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창세기 27:22-23)
목사 안수의 대한 기대가 있었다. 연회의 감독님과 속한 지방에 감리사님 그리고 담임목사님의 손에서 나오는 거룩한 기름부음의 능력이 그분들의 손길을 통해 내 머리로 임파테이션되어 그때부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즉시 나을 것이라 기대했다. 사실 이런 기대 속에는 유명해져서 큰 교회 목사님이 되어 방송에도 나가고 평양대부흥운동 집회에서도 회개하라 하고 외치는 멋진 목사가 되고 싶은 야망도 들어있었던 것 같다.
야곱이 이삭에게 축복안수기도를 받으려는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장자권을 받아 아버지 유산을 몽땅 다 물려받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축복이 임하여 어디를 가나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의 종이 되고 싶었을까?
그런 마음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삭에게 축복을 받은 이후부터 야곱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형 에서는 자신을 죽이려 하고, 그 사실을 안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피신시킨다. 쉽게 말해 유산을 부모로부터 땡전 한푼도 물려받지 못하고 형 에서가 다 가진다.
집에서 쫓겨나 노숙을 한다. 사다리에 천사 몇 마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환상을 보지만 그 질투많은 야곱에게 그런 환상과 꿈은 그닥 위로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듯 하다.
거기에서 돌베개 베고 자면서 이렇게 생각하며 후회했을 것 같다.
“에이 씨, 축복(안수)는 괜히 받았나? 내일은 어디서 자나? 엄마는 자기가 책임진다매 이게 뭐여~ 그래도 엄마 보고 싶다 씨~!”
나도 목사안수 받고 야곱처럼 후회한 적이 있고, 지금도 가끔 후회를 하곤 한다.
“에이 씨, 안수 괜히 받았나, 다음 사역지는 어디가 될까? 사역 계속 할 수는 있을까? 부모님 보고 싶다 씨~!”
야곱의 삶을 보면 참 어쩌면 이렇게 못났을까 싶다. 레아와 라헬, 실바와 빌하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질투와 시기의 싸움. 그 자녀들 역시도 질투로 요셉을 죽이려다가 종으로 팔기까지 했으니… 인간은 원래 그렇다고 하지만 이 놈의 집구석은 정말 바람 잘 날이 없다.
혹시 이삭의 축복의 결과가 자식을 통한 한방? 그럼 목사안수의 능력도 내 자식들에게서 먼 미래에 발현되는 것일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은 우리의 꿈과 야망 그리고 비전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야곱, 장인이든 뭐든 자기 이익에 반하면 다 끊어내고 그저 내 가족, 내 재산, 내가 중심이었던 그를 하나님이 부르신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것 처럼 말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일단 그냥 걸어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