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의 추억

부모님이 감신대를 고집하신 이유

감신 2022. 1. 8. 12:51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너무 못하지도 않았다. 그냥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점수는 안나오는 그런 평범한 아이였다. 대학원서를 넣는데 감신만 지원을 하니, 담임선생님께서 혹시 떨어지면 재수할 수도 있으니 다른 곳도 지원하라고 해서 목원대도 지원을 했다. 당시 감신과 목원이 군이 달라서 함께 지원할 수 있었는데, 목원측에서 그 다음 해에는 군을 같이 해서 동시지원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협성출신이면서도 나에게 감신을 고집했다. 어머니 역시도 자신의 영적 아버지가 목원 출신임에도 목원이 아닌 감신을 고집하셨다. 두 분이 나에게 그렇게 감신을 고집한 이유는 다름아닌 감신출신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정치싸움에서 엄청난 마음고생이 많으셨음에 자기 아들은 그런 고생과 아픔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리라. 당시 고만고만한 커트라인의 순서가 감신이 제일 높고 그 다음이 목원 그리고 협성이었다. 따라서 협성이 눌림의 대상이 된 것은 학벌이 중하던 한국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감신을 붙은 후에 어머니는 같은 사모들이 “아들 어디 대학갔댜?~”라고 물으면 자랑스럽게 “서울 감신이요!”라고 대답하셨던 것이 생각난다. 그 중에 한 사모는 “그렇게 공부못하는 애가 서울 감신을 갔다구요?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혹시 대기번호 몇 번인데 붙었다고 하는거 아니에요?”하면서 엄마 심기를 건드렸지만, 진짜 합격한 것을 보고 그 이후에는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 수능점수가 지금까지 본 점수 중에서는 가장 높지만 상대적으로는 별로인 것을 아시고 나를 데리고 감신합격을 위한 특별소나무뽑기 기도를 하러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기도원을 가셨다. 여기에서 만난 원장님, 죽음을 극도로 무서워하고, 검은색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옷도 못입게 하는 기도원할머니 이는 다음 기회에 따로 다루기로 하자.(예고 - 누구나 기도원 할머니 한명쯤은 다 키우고 있다.)

 

그리고 면접과 성경시험을 위해 집에서 엄청난 준비를 했다. 이때 아버지는 나에게 성경 창세기 1장부터 계시록 22장까지 장과 절별로 공책을 사다가 요약을 시키셨다. 그리고 논술준비도 아버지의 지도아래 공부를 했다.

 

이런 간절함으로 감신은 입학하기 전부터 나에게 특별한 학교가 되었다. 합격통보를 받은 후, 목원대 관계자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와 통화를 해도 되는데 구지 나를 바꿔달란다. 장학금을 주고 여러 혜택을 주겠노라고 설명을 하셨지만 내 마음과 생각은 이미 감신에 꽂혀있기에 그의 간절한 설득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목사가 되기 위한 첫 발걸음의 시작인 대학, 여러 대학 중에 하나였을 뿐이데, 그렇게 나에게 감신은 특별함이 되고, 어머니가 되고, 위치가 되고, 능력이 되고, 간판이 되고, 이력이 되었다.

 

지금은 세 신학교 모두 미달, 협성이 목원보다 커트라인이 높아졌다고 한다.

 

결론: 서울대든 지방대든 미국대학이든 일본대학이든 그저 내 돈내고 입학하는 학교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