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 상자 밖으로

도피로서의 이민

감신 2022. 1. 7. 05:41

pixabay

 
오늘은 내 이야기를 좀 풀어보자. 내가 이민을 온 이유는 한국에서의 삶에서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누구는 유학을 누구는 목회를 또 누구는 경험을 위해서 해외생활을 선택하지만 난 정말 도망치려고 이민을 왔다. 부모님도 감리교 목회자, 아내도 감리교 목회자 집안의 딸.

 

유학이라는 핑계로 타국으로 떠나왔지만 사실 유학이 아닌 도피였다. 감리교에 대한 상처가 많았다. 그리고 그 상처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듯 하다. 가끔 욱하고 올라오지만 분노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인생이 이렇게 쓰디 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사람들이 쓴 소주를 안주도 없이 그렇게 즐겨먹나보다. 물론, 더 아프고 힘든 인생에 비하면 평탄한 삶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참 외롭고 버겁고 힘들었던 한국의 삶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회, 은퇴 그리고 은퇴 후의 삶을 보면서 차라리 목회를 하지 않았다면 이꼴 저꼴 보지 않고 평안하게 사셨을텐데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성도에게 당했다면 그나마 목회가 그러려니 하며 견디겠지만 같은 목회자들끼리 서로 찌르고 죽이는 모습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실까라는 의문을 들게 할 정도로 나에게 충격이었다. 그래서 생긴 감독포비아, 정치한다고 하면 아무리 선거를 하지 않고 은혜로 뽑혔다고 해도 목에 화이트 컬러 달고 거룩거룩해도 믿지를 못하겠다. 부모님께 그런 상처를 준 그 사람은 결국 돈을 열심히 풀어 감독이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감리교에는 소망이 없음을…

 

그래도 남부연회에서 잘 배운게 딸랑거리는 모습이라 감독님이 오시면 충성을 다해 모시며 떨어지는 봉투에 기분좋아라 하는 나의 이중적인 모습도 참 비참했다. 그렇게라도 내가 억지로 낸 은급비 나에게는 전혀 돌아오지 않는 그 세금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마음에 앞에선 감사합니다, 속으로는 교단이 나에게 해준게 뭐냐라고 비웃는 것을 교단 어르신들이 알까?

 

자랑은 아니지만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전도 많이 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근본주의자였고, 오랄로버츠, 케네스해긴, 배니힌, 피너와그너, 릭 조이너, 체 안, 샨볼츠, 윤석전, 하이디베이커, 등등의 사람들이 나의 롤모델이었으며 실제로 나에게 쓴 소리하는 친구에게 면전에 대고 예수이름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넣는 귀신이 떠나가라고 축사를 한적도 있었다.

 

내가 기도하면 죽은 사람이 살아날 줄 알았다. 정말 큰 대형교회 목사들이 신학생때 지하철 전도를 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부평에서 감신대까지 오는 1호선 지하철 안에서 칸칸마다 돌아다니면 복음을 전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사건과 아픔을 통해서 이게 다 뻥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런 근본주의에서 나를 탈출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을까?

 

자기 힘들어 죽겠다면서 아버지에게 와서 제발 교회좀 트레이드하자고 빌고나서 몰래 장로를 찾아가서 김목사 여기 떠난대요라며 여론몰이로 어떻게 해서든 임지를 맞바꾸는 목사, 깡패출신으로 얼마나 지은 죄가 많은 지 이름을 본명으로 쓰지 않고 다른 이름을 쓰며 아버지를 폭행한 것도 모자라 또 다른 목사를 때린 뒤에도 위대한 100만 감리교의 감독이 되는 웃픈 모습들, 이런 사건 뒤에 때린 그 목사보다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선거에서 이기려고 하는 목사들이 더 감리교 목사인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런 폭풍을 지난 뒤에 목회를 그만 두고자 이민을 왔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 목회를 하고 있다. 사실 뉴질랜드에 와서 위로를 많이 받았다. 이 교회에서 사랑받고 위로받고 돌봄받는 가운데 거의 잃어버렸던 신앙도 회복해가고 있다.

 

입에 담지 못할 욕들을 뿜어내던 내가 다시 사랑과 용서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감리교 역시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겠지라며 다친 마음을 추스리고 있다.

 

아버지가 물으셨다.
“여기 장로님들이 너 삼단 돌려치기로 임지 알아봐주신다고 하는데 아들아 안올래”

 

장모님도 나에게 물으셨다.
“너 정말 이 교회 안물려받을래?”

 

다시 돌아가면 신앙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아내와 상의 후에 안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마음 먹으면 삼단 돌려치기로 꽂아줄 수 있는 분들이셨지만 아들이 안간다고 하니 그리고 한번 와보셔서 직접보니 이 교회에서 내가 정말 이용당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돌봄받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교차세습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과 함께 아들과 사위 심으려고 이꼴저꼴 보지 않으시고 두분 다 멋지게 은퇴하셨다.

 

갑자기 말미에 이 성경구절을 쓰고 글을 마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대충 왜 내가 여기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본다.

 

높은 빌딩 7-8층에 앉아서 어디놀러갈까 궁리만 하지 말고 이런 상처받은 수많은 목회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시스템을 잘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지도록 좋은 감독이 나오면 좋겠고 한 사람의 단발성의 노력이 아닌 모두가 힘을 합쳐 좋은 감리교, 나같은 젊은 목사들이 소망과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곳이 되길 기도해본다.